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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고싶다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생각 나는 책

by 정화된밤 2015. 2. 19.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에세이1)

저자
전혜린 지음
출판사
민서출판사 | 2002-01-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독일 유학후 대학교수로 생활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저자의 자서...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책이 하나있다.

봄, 여름, 가을 동안 책장에 꽂혀있다가 겨울이 되면 나도모르게 손이 그 책으로 뻗쳐 책장에서 끄집어낸다.

바로

전혜린의 에세이다.

전혜린의 에세이는 그녀가 1958년부터 1965년까지 7년에 걸쳐 써놓은 일기를 엮은 것으로  독일에서의 삶과 전혜린의 딸 정화를 키우면서 쓴 육아일기 등을 담고 있다.


1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권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전혜린은 1934년 1월 1일에 태어나 1952년 서울대 법대를 다니던 도중 1955년 도독하여 뮌헨대에서 독문을 전공하고 졸업 후 1959년 귀국하였다. 그리고 1965년 1월 10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겨우 31년을 살고 떠난 그녀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힘들게 하였을까. 



전혜린의 에세이를 알게 된 계기는 내가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 약 8개월이 넘었을 무렵이었다.

기대했던 독일이라는 나라의 환상(Illusion)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독일생활에 익숙해졌을 때 즈음 내 자신에게 이곳에서의 희망(Wunsch)과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던 시점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이 책을 미리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을 까 하는 의문이 든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를 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잘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 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마의 싯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으로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 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포장마차를 타고 일생을 전전하고 사는 집시의 생활이 나에게는 가끔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노래와 모닥불가의 춤과 사랑과 점치는 일로 보내는 짧은 생활, 짧은 생. 내 혈관 속에서는 어쩌면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공상해보고 웃기도 한다."



이 문구로 나는 전혜린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되었다. 

누가 이런 글을 썼을까? 이 두 단락에 나는 그녀에게 압도되었다.

무수한 물음들과 함께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찾아 헤매었고, 그 해 겨울이 되던 해 책을 어렵사리 구하고 학교로 가는 지하철, 기차에서 읽으며 책을 끼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녀 속에는 "방랑자의 기운.." 스스로 말했 듯이 "집시의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녀는 분명 모험(Abenteuer) 같은 삶을 원했다. 하지만 현실속에서 그녀의 삶은 그녀의 바램과는 반대로 거의 10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번역일을 해야했다.(번역은 그녀가 좋아하는 일인 것 처럼 보였지만..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기도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기에 금전적인 문제에 대해 자주 언급했기 때문.) 

그녀 안에는 다른 욕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욕구를 자유롭게 펼칠 수 없는 그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만 같다.


새해가 되면 그녀는 건강을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기도를 하지 않는다.

나를 압도시키는 일... 어떠한 일상적이지 않은 〃새로운〃것을 원했다. 그녀가 썼듯이..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 단어하나하나가 그녀를 말해준다.


 그녀는 우리세대보다 70년을 앞서간 사람이다. 지금이야 외국으로 유학을 가거나 여행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화가 되어버렸지만, 1960년대에 독일에서 공부한다는 것, 외국에서의 유학은 오늘날의 유학과는 의미가 아주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시절 특정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였을 것이다. 물론 그 특정 소수사람들이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현명한 사람들 중 여유가 있는 집안에 해당할 것이며 그녀는 독일유학 후에 자신의 인생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 것이 그녀가 원하는 삶이 아닐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본다.


전혜린이 독일로 온 계기에 대해서 쓴 글▽


독일로 가는 길


"왜 하필 독일에 가게 되고 또 독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는가? 라고 간혹 질문 받을 때마다 나는 한마디로 대답을 못한다. 그리고 `우연이지요' 라고 대답할 때가 대부분의 경우였다. (...)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대학까지를 관립 학교만을 나왔었고 다녔었다. 또 점수따기와 책상버러지와 독서광의 부류에 속해왔다. 따라서 이러한 경로를 밟은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온갖 관료적 점수주의적 암기식 교육에 대해서 맹렬한 반발과 자유로운 학문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품고 있었다. (...) 궁극적인 것이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유일의 것은 그때의 나에게는 정신(Geist), 또는 철학이라고 느껴졌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 부터인지 철학을 공부하려 마음 먹게 되었고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외국에 간다는 것은 언젠가의 꿈으로 돌려져 있었다. 대학 3학년, 내가 스물한 살 때였다. 나의 둘도 없는 그때 미국에 가 있던 주혜라는 친구가 독일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고 편지를 했었다. 주혜는 그의 아버지의 친구인 독일인을 서신을 통해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1955년 가을이었다."



어떤 문구는 공감할 수 밖에 없어서.. 혹은 내 마음을 너무나 대변하는 것 같아서 절대 잊을 수가 없었고, 몇몇의 글들은 그녀가 고작 내 나이 혹은 나보다 조금 더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들을 하고 글을 썼다는 사실에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산다는 것이 기다림이라는 것을 더욱더 느낀다. 매일 눈을 뜨면 하루를 기다리게 된다. 무엇이 꼭 일어날 것만 같고 기적같이 눈이 환히 뜨이는 정오가 올 것 만같고 마술의 지팡이로 나의 일상 생활이 전연 다른 맛 - 좀더 긴장된, 풍요하고 충일한, 가득하고 뒤 끓는 맛 - 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매일 아침 기다리고 있다. 꼭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고 무엇이 일어날 것만 같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줄은 미리부터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죽음의 면전에서


2월 16일

"나는 모순의 벽으로 밀쳐져있다. 내 속에는 무의 황량하고 차가운 영지가 있다. 나는 생과 세계에 소외감을 느낀다. 옛날에는 자명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불가해 하고 모순되게만 보인다. 나는 왜 살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가, 알고 싶어 못견디겠다.

생(生)이란 살아질, 지켜나갈 만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어떠한 권리로 나는 하나의 생명을 세상으로 보내는가? (...) 나는 지금 죽든, 20년 후에 죽든 마찬가지다. 영원한 침묵을 지키는 시공에 비하면 모든 것은 그렇게도 헛된 일이다. 요컨대 인간의 생은 추구할 만한 게 못된다. 가깝든 멀든 미래에는 죽음이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행동하고 있다. 그것을 회피하고 있다. 모든 것, 모든 다른 것은 끔찍이도 생각하지만 죽음만은 조금도 생각질 않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인간에게 터부(Tabu)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서는 미쳐 버릴 것이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2월 17일

"(...)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마비시킬 수 있기 위하여. 

그렇지 않고서야 살아내지를 못할 것이다.

인간이 동물화하면, 그것이 이상적이리라. 인간이 더 사고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게 낙원일 것이다!"


2월 23일

"생의 의지와 죽음에 대한 불안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생의 거대한 의지를 소유하지 않는 자라도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질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미지의 것. 어두운 것에 대한 불안을....

바로 그것을 여자는 출산 앞에서 감지한다. 무엇을 세상에 가져오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알지 못하고 이해 못하고 있는 그 무엇 앞에서 여자는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그녀의 일기에는 마음 한 구석을 찌르는 문구들이 너무나도 많다. 

전혜린은 그녀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고유하고 (eigenartig) 유일무의한 (einzigartig) 그녀의 글 솜씨로 풀어서 매일 기록했고, 그녀가 던진 물음들은 항상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했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쓴 글들은(출판용이 아니었다고하니..) 나같이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혹은 그 것을 읽는 누군가의 가슴 속을 한참동안 헤집고 다니는 오묘한 활력을 가진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정화를 임신한 후부터 출산이 다가올 수록 그녀는 죽음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일기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아주 자주 등장한다.  읽고 있으면 마치 Propaganda 같아 혹할 것 같다.

한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것에 대해.. 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아는 그녀로서는 아주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타의에 의해 태어나야할 아기에 대한 죄책감도 함께....

 

"왜 나는 태어난 것일까? 인간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태어나야 하고 그리고 왜 죽어야 하는 가? 죽음 후엔 무엇이 올 것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어떻게해야 우리는 신을 알 수 있을까? 도대체 삶이란 의미를 지닌 것인가? 언제, 어디로? 이 모든 의문은 나를 떨어지지 않고 추격한다. 괴롭힌다. 나는 너무도 깊게 슬프다. (...) 결국 제일 쉽고 제일 행복한 상태는 온갖 의욕이 없는 것(삶의 의욕조차도), 즉 정지, 죽음의 상태인 것 같다. 의욕이 있는 곳에는 아픔도 있는 것이니까! 의욕, 발전, 움직임, 흐름...... 이 모든 것은 필경은 고통의 어머니다. 고통이 없어지려면 우선 생각하는 내가 없어지든가, 내 속의 사고가 없어지든가,  그 중에 하나밖에 길이 없다."


죽음에 대한 끝없는 의문. 죽음이란.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물음. 이 단어는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의 생각의 생각을 지겹도록 쫓았다. 



"산다는 일, 호흡하고 말하고 미소할 수 있다는 일, 귀중한 일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전에는 욕망도 많았다. 중학교 때, 죽어도 평범한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지금 껏 어느 마녀의 저주같이 따라다니고 있다. 나를 그렇게 형성하려고 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소망은 얼마나 오만과 무지를 나타내고 있는가?

너무나 순수하게도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 악의없는 그러나 연민섞인 미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보와 같은 어린 시절, 그리고 청춘 시절 - 지금 나는 `서야한다'는 - 자기 자신을 사회 내에서 존재케 해야한다는 나이에 들어섰다.

30세! 무서운 나이! 끔찍한 나이의 축적이다. 어리석음과 광년의 금자탑이다.

여자로서 겪을 수 있는 한의 기쁨의 절정과 괴로움의 극치를 나는 모두 맛보았다.

일순도 김 나간 사이다 같이 무미한 순간이라곤 없었다. 팽행했고 터질 듯 꽉 차있었다. 괴로움에, 기쁨에 그리고 언제나 나는 꿈꾸고 있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꿈 없이는 살 수 없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현실만이 전부라면 인간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무엇일 것이라 확신한다.

이상과 꿈이 우리를 만든다. (...) 거창하거나 보편 타당하고 인류의 귀감이 될 만한 `엄청난 무엇'은 이미 나와 멀어졌다.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그녀는 그녀가 어릴 적 꿈꿨던 비평범한 삶을 더이상 추구하지 않는 것 같아보였다. 그것을 억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삶의 마지막을 보았을 때, 결코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던 것이다.


1959년 3월 15일

"꿈과 같이 모든 일이 지나가 버렸다. 모든 것이 그렇게 돌변했고 압도적이었다. (...) 스페인 고문, 종교재판, 낳을 때 여자는 아프다... 등 기타 여러 말이 생각났으나 어떤 말도 이 아픔에 비길 때는 비교가 안 되는 창백한 느낌이었다. 나는 아픔이 괴로운 나머지 죽음을 마음속에서 원하기까지 했었다. 이 아픔을 멈추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다. (...) 곧 산파의 목소리로 "딸입니다!"라는 말이 들렸다. (...) 그리고 두손을 다 입에 넣고 쪽쪽 소리를 내면서 빨다가는 울고 또 빨다가는 울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광경에 웃음이 나왔다. 모든 고통은 씻은 듯이 달아나 버린 후였다. (...) 아직도 이해 안 되는 이 경이는 내 나이 25세 때 일어난 것이다."


3월 X일

"(...) 내가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워했었던 것은 내가 과연 그 미래의 내 아이에 대해서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 그러나 출산이 끝난 직후 내 아이와 첫 대면을 했을 때 이 공포는 사라지고 말았다. 첫 눈에 반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3월 X일

"(...) 정화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고 이상한 것 같다. 정화는 정말로 재미있게 살고 있는 것 같다. 정화의 행복은 아직도 공포를 모른다는 것. 생과 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도대체 생각은 최소한도로 하고 그냥 살고 있다는 것, (...) 예수가 말한 그대로 하루에 족하게 살고 있고 내일 걱정이나 삶의 근심이 없는 점. "

 

2월 X일 

"(...) 많은 어머니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방해받고 또 스스로 아이를 방해하면서 자기가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 방법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없이 24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제나 아이를 위해서 거기에 있는 어머니다. 그러나 과연 그 여자들은 정말로 있는 것일까?(...) 그들은 스스로의 생을 택하지도 살지도 않았으므로 결국 남의 생(아이들의 또는 남편의 생) 속에서 그 보상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 노력과 투쟁 속에서 고독과 성실한 기회 속에서 참된 인간적 가치를 획득하는 여자야 말로 가장 좋은 교육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여자가 경제적, 정치적, 사회생활에 있어서 한 역할을 담당하려는 최근의 일반적인 경향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그녀는 나중에 커서 이 글을 읽을 정화를 위해서 출산 후에 작은 생각하나하나들을 꼼꼼히 메모했다. 글을 읽다보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공부와 노력을 했는지 느껴진다.

나는 무엇보다 아이를 때묻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존재에 비유한 것에 공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년기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에세이 두 권의 책을 읽는 것은 의외로 금방이다. 몇몇 문구는 읽고 또한번 읽어 내안에 스며든다. 

그녀는 고독했고, 죽음을 갈망했다.

삶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동경했지만 작은 일들은 그녀를 채우지 못했었는지 그녀는 떠나고 말았다. 왜 그토록 서둘러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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